한 가지 질문을 먼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막 제작자(이하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가 왜 자막을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능력이 되시는 일부 분들은 취미이실 수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아마추어 영상 번역가는 자신의 공부를 위해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시작은 그랬으니까요. 제가 처음 애니메이션 자막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중학교3학년 즈음입니다. 당시 용산에서 5천원인가 하는 돈을 주고 불법 백업 시디를 구입했더랬는데, 자막이 매우 허접한 수준이었던 거죠. 고등학생이 되면 제 2외국어라는 걸 배운다니, 기필코 일본어를 배워서 이깟 것 자막 없이 보겠다고 결심한 것이 화근이었죠. 때를 맞춰 일본 문화가 본격 개방되며 일제 애니메이션이 물밀 듯 밀려온 것 역시 원인 중 하나일 겁니다. 그게 아마 90년대 말인지 2000년대 초반인지 그랬을 겁니다. 당시엔 뉴타입이니 하는 잡지 같은 것도 없었다니까요? (정식 라이센스 기준)
그럼 문화 개방 이전에는 그럼 애니메이션 동호회나 아마추어 영상 번역을 하는 사람이 없었느냐? 당연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미드랑 락 음악도 규제하던 시절, 음성적인 루트로 유입되고 유행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다를 거 없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하나넷(하나포스의 전신)의 HAC 동호회도 있었고 MP3 공유 사이트였지만 실은 음성적으로 애니메이션을 공유하는 사이트도 제법 많았죠. 그러한 곳들에서 조용히, 은자처럼 숨어서 꼬물꼬물 활동하고는 했습니다. 그것이 급물살을 타면서 이런저런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를 낳기에 이른 것이지요.
당시에는 정말 매니악한, 혹은 정보가 빠른 한움큼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문화였기에 자막 제작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늦으면 늦는 대로 허접하면 허접한대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나 회상해봅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문화가 급물살을 타며, 음성적으로나마 매니아 층은 급속도로 커졌고, 그와 동시에 취미로 자막에 손을 대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인지도를 얻고, 그러면서도 빠른 시간 안에 만들며 퀄리티도 썩 괜찮은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들 그에 동참하듯 하나둘 빠른 자막 내기에 열중하기 시작했지요. 즐기자고 시작한 일에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거죠. 심야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려고 밤을 새거나 꼭두새벽에 알람을 맞춰뒀다 일어나 작업을 하는 분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막을 빨리 내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늦게 낸다고 경찰 출동 안 하고 쇠고랑을 차지는 않지만, 일찍 안내면 외면 받고 욕을 먹는 환경이 돼버린 거죠.
‘왜 이 시간이 되도록 자막을 안 내놓느냐’
최근에는 자막 제작자들의 RSS이나 등록 상태를 체크했다가 실시간으로 띄워주는 위젯 등이 참 많습니다. 저 역시 가라사니 측에서 운영하고 있는 위젯에 등록을 하고 매주 자막을 올리면서 갱신하고 있지요.
저러한 말을 하시는 분들의 논지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동영상이 뜨면 당연히 자막이 올라와야 하는 것 아니냐’ 혹은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등록을 한 것은 이걸 번역하겠다고 네티즌들과 약속한 것이 아니냐’ 또는 ‘다른 애들은 벌써 등록했는데 왜 너는 안 올렸냐’. 뭐 대충 이런 것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그럼 반대로 묻겠습니다.
언제부터요?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것이 인터넷에 계시는 불특정 다수의 분들과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 한 명과의 약속이 되었죠? 언제부터 자막이 동영상이 뜨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되었죠? 언제부터 본인의 공부를 겸한 취미가 속도 경쟁이 되었죠? 우리가 무슨 레이서입니까? 순위 경쟁하게? 아니잖아요? 약속이요? 계약이라도 하셨습니까?곧 죽어도 보는 이는 갑이요 만드는 이는 을입니까? 그럼,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가 자막을 만들면 십 원짜리 한 닢이라도 주십니까? 안 주시잖아요? 실컷 일 시키고서 십 원짜리 한 닢도 안 주시면 그건 강제노역이죠. 근로기준법 위반이십니다. 자, 그런 거 아니잖아요? ^^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 본인은 본인을 위해 비영리 목적으로 번역을 하는 겁니다. 추종자나 바깥세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지도 같은 건 부차적인 겁니다. 네? 그게 목적인 분들도 있다고요? 뭐, 이런 부분이야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니 이해하고 넘어갑시다. 왜, 취미는 존중되어야 하잖아요?
이런 논리를 늘어놓으면 성격 급한 한국사람 몇몇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뭐가 어째? 너 아니면 번역하는 놈이 없냐? 나, 딴 자막기계가 만든 거 볼 거다!’ 뭐, 이런 협박문구 비스무리 하게요.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아이고, 매니아님들 이것 좀 봐주세요’ 하면서 상납하듯 작업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봐 주시고 격려를 받으며 보완할 점을 지적해주면 그로 인해 가르침을 얻는 일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내가 한 일이 누군가의 도움이 되었고 그만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니까요. 아무리 달변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손바닥 하나로는 손뼉을 못 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뿐입니다. 인지도, 관심을 받는다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일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득이 되는 일은 아니니까요. 냉소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뭘 어떻게 생각해도 성격 급하신 몇몇 분들에게 굽신거려야 할 입장도 아니거니와 이유도 없다,이 말씀입니다. 독촉을 받아야 할 입장은 더더욱 아니죠. 급히 마신 물이 체하는 법입니다.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들도 사람입니다. 예, 다이어트를 결심한 날 한밤중에 치맥이 땡기기도 하고, 주말이 되면 영화 보러 나가고도 싶고, 여친이 있을 누군가는 데이트도 하고 싶을테고, 봄이나 가을이 되면 나들이를 가고 싶고, 마음 상하는 일이 있는 날에는 술이 땡기기도 하는 사람이요. 기분이 광녀가 널뛰듯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하고 갈대처럼 마음이 변하기도 하는 사람이요. 그네들이 말하는 기계 말고, 사람. 각자 다른 이유, 다른 사정, 다른 의식을 가졌으며, 다른 환경 속에서 근근이 취미 활동 삼아 애니메이션 자막이라는 걸 만드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뭘 하셨나요? 어디, 밖에서 재미나게 노셨나요? 재미난 게임이라도 하셨나요? 친구들하고 모임이라도 가지셨나요? 의욕이 없어서 방구석에서 뒹굴렀나요? 그것들, 저(혹은 우리)도 하고 싶습니다. 뭐가 우선인지는 묻지 마세요. 그 때 그 때 다르니까.
그래도! 곧 죽어도 빨리빨리 자막이 나와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럼 답은 간단합니다. 직접 일본어를 배우는 것보다 간단한 답이 있습니다. 계약을 하십시다. 마법소녀가 되는 계약 말고. ‘을 XXX는 갑 OOO에게 #####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자막을 소스 공급 후 *시간 안에 공급하기로 한다. 이 때, 원본 소스는 의뢰자인 갑이 제공하도록 한다. 갑은 을에게 납품되는 자막의 보수로 편당 금*****원을 지불한다’ 라고요. 어떻습니까, 합법적으로 아마추어 애니 번역가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계약 불이행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니까요? 무슨 기준으로 요율을 정하냐고요? 걱정 마세요,모종의 이유로 제가 정식으로 집계된 번역 요율과 영상 재제작 업계 관행으로 정해진 요율을 그럭저럭 알고 있거든요. 상담 주시면 바로 견적 짜겠습니다. ^^
끝으로, 저는 애니메이션 번역과 기타 서브 컬처의 번역을 취미로 삼은 지 어언 10년이 되어갑니다. 초기 제작분을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몸 전체가 나노사이즈로 퇴화할 것만 같습니다만 그 시절, 한 시도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자판을 두들기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웃지 못 할 사건도 몇 있었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좋은 추억이라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자막을 며칠 째 기다리십니까? 그럼 독촉 대신 격려 한 말씀 주십시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 오고가는 격려가 밑거름이 되어 작은 동기로나마 부여가 된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좋은 결과물이 되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설사 당장은 성장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훗날, 아마추어 애니 번역자가 반추하며 흐뭇하게 웃음 지을 일은 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집과 독선과 자기중심적인 주장과 경험으로 가득한 장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이만 글을 마치렵니다. 평안하십시오.